422줄의 코드로 뇌간을 만들다

Knowledge Bus가 기억을 저장하게 만들고 나서, 금방 한계가 보였다.

파일은 쌓이는데 구조가 없었다. 서로 다른 규칙이 충돌하고, 어떤 룰이 더 우선인지 판단할 기준이 없었다. 세션 하나에 수십 개의 지침을 때려넣으니, 에이전트는 점점 무뎌졌다. 말은 많아졌는데 행동은 엉뚱해졌다. Knowledge Bus가 에이전트에게 기억을 줬다면, 이제 필요한 건 기억을 조직하는 뼈대였다.

인간의 뇌를 모델링하기로 했다. 신경과학 교과서를 뒤적인 건 아니고, 그냥 상식 선에서 접근했다. 뇌간은 절대 명령을 내리는 부분이다. 변연계는 감정과 정체성을 관리한다. 해마는 기억을 저장한다. 전두엽은 계획을 세운다. 이걸 폴더 구조로 그대로 옮기면, 코드 없이도 에이전트가 계층적으로 사고하게 만들 수 있지 않을까.

Obsidian vault에 7개 폴더를 만들었다. P0부터 P6까지.

P0-brainstem — 절대 규칙. 禁(geum)은 “금지”라는 뜻의 한자다. 한 글자가 여덟 글자의 의미를 전달한다. 禁secrets_in_code는 API 키 하드코딩을 금지한다. 禁rm_rf_root는 루트 삭제를 막는다. 이 폴더의 규칙은 어떤 상위 규칙보다 우선한다. 뇌간은 협상하지 않는다. P1-limbic — 정체성과 말투. 반말로 할지 존댓말로 할지, 어떤 어조로 대화할지, 어떤 가치를 따를지. P2-hippocampus — 기억. Knowledge Bus가 저장한 모든 데이터가 여기로 들어온다. raw archive. 에이전트가 직접 손대지 않는 읽기 전용 공간이다. P3-sensors — 게이트웨이와 도구. Discord, WordPress, 터미널 같은 외부 연결점들. P4-cortex — 스킬. 코드 리뷰, 글쓰기, SEO 분석 같은 모든 작업 방법이 폴더 구조로 정리된다. P5-ego — 자기 모델.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정의. P6-prefrontal — 계획. 장기 전략, 회고, 인시던트 분석.

이게 끝이 아니었다. 진짜 발상의 전환은 여기서부터다.

코드로 규칙을 강제하지 않는다. 파일 시스템 구조 자체가 행동을 유도하게 만든다.

일반적인 소프트웨어 아키텍처는 규칙을 코드로 박는다. if rule_violation: reject(). 나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대신 폴더 계층 자체에 우선순위를 부여했다. P0가 P1을 덮어쓰고, P1이 P2를 덮어쓴다. 디렉토리 깊이가 깊을수록 우선순위가 낮아진다. 코드 한 줄 없이, 폴더 트리 하나가 의사결정 계층을 형성하는 구조.

사람들은 “왜 굳이 파일 시스템이냐”고 묻는다. 이유는 단순하다. 파일 시스템은 이미 완벽한 트리 구조다. 운영체제가 강제하는 위계가 이미 있다. 내가 한 일은 거기에 이름을 붙인 것뿐이다. P0-brainstem, P1-limbic, P2-hippocampus… 이 이름들은 단순한 라벨이 아니라, 에이전트가 특정 디렉토리를 로드할 때 “이 폴더의 규칙은 이 폴더보다 우선한다”는 의미를 전달한다.

이걸 NeuronFS라고 이름 붙였다. Neuron Filesystem. 파일시스템 자체가 신경망 구조다.

사람들이 “AI 행동을 어떻게 통제하냐”고 물으면 대개 비슷한 답이 돌아온다. “시스템 프롬프트로 제한한다”거나 “룰 엔진을 만든다”거나. 나는 반대로 갔다. 규칙을 코드로 짜지 않고, 규칙 자체를 파일로 만든다. 그 파일이 놓인 폴더 위치가 곧 우선순위다.

422줄. 그게 이 구조 전체를 초기화하는 코드의 전부였다. 나머지는 전부 마크다운 파일과 디렉토리다.

禁 뉴런 설계가 특히 마음에 든다. 禁blind_write는 파일을 읽지 않고 그냥 쓰는 행위를 금지한다. 이걸 일반적인 코드로 구현하려면 파일 시스템 이벤트를 후킹하고, writable stream을 감시하고, 예외 처리를 해야 한다. NeuronFS에서는 그냥 .neuron 파일 하나다. 내용은 “파일 읽기 전에 쓰지 말 것”. AI가 이 뉴런이 있는 폴더를 로드하면, 그 규칙이 시스템 프롬프트에 박힌다. 끝. 마크다운 한 줄이 코드 100줄을 대체한다.

이 방식의 진짜 강점은 규칙 추가 비용이 0에 수렴한다는 점이다. 새 제약이 필요하면 .neuron 파일 하나 만들고 적절한 P-layer 아래 넣으면 된다. 배포도, 테스트도, CI/CD 파이프라인도 필요 없다. 깃헙에 푸시하고 에이전트가 재시작할 때 디렉토리를 다시 읽으면 끝이다. 제약 조건을 인프라로 다루는 게 아니라 문서로 다루는 것 — 이게 전부다.

아키텍처란 결국 의사결정 트리다. 코드가 아니라, 무엇을 어디에 둘지 결정하는 행위 자체가 설계다.

Knowledge Bus가 “기억”이라는 원료를 모은다면, NeuronFS는 그 원료를 뇌 구조로 조직한다. 센서가 정보를 받고, 해마에 저장하고, 뇌간이 우선순위를 정하고, 전두엽이 계획을 세운다. 사람이 생각하는 흐름 그대로다.

구조를 다 만든 날 밤, 터미널에 tree -L 2를 쳤다. 7개 폴더가 정확히 그 순서로 나왔다. P0-brainstem, P1-limbic, P2-hippocampus, P3-sensors, P4-cortex, P5-ego, P6-prefrontal. 마치 실제 뇌의 MRI 스캔을 보는 느낌이었다.

에이전트는 뇌간을 얻었다. 422줄짜리 파이썬 스크립트 하나로.